비/빗자루 추帚

『帚가 빗자루의 상형이라는 것은 허구고, 본래 새를 그린 글자가 조鳥-추隹-추帚로 점차 추상화가 진행돼 만들어진 형태다.(이재황의 한자 이야기, 고전문화 연구가, 2008.03.21, 프레시안 연재물에서)』라는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 ‘비/빗자루 추帚’는 집 안을 청소하는 도구인 빗자루가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이라 한다. 위쪽 ⺕ 부분이 물건을 쓸어 내는 부분이고, 아래 巾 부분이 손잡이이며, 중간의 冖 부분은 끈으로 묶은 모양 또는

머무르다(μένω, méno)

사람마다 자주 사용하거나 입에 붙어 있고 좋아하는 말마디가 있게 마련이다.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2곳에서 보이는(횟수로는 더 많다) ‘머무르다’라는 단어이다. 복음사가 요한을 특징짓는 말 중 하나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의 언어인 희랍어에서 ‘메노’(μένω, méno, 머무르다, 붙어 있다, 남다, 지내다, 영어 : to remain, to abide, to stay)’라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이 말은 괄호 안에 서술한 일반적인 동사의 개념이

성덕의 향기

장미 나무를 접목할 때 갈라진 줄기 틈새에 사향 알갱이를 넣으면 거기서 피어나는 장미가 모두 사향 향기를 내게 되듯, 그대의 마음을 거룩한 회개로 쪼개고 그 틈새에 하느님의 사랑을 넣은 다음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덕을 접붙인다면, 거기서 피어나는 잎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성덕의 향기를 풍길 것이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神愛論, 제11권 제2장) If you are grafting

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

언제부터인가 수도자, 사제, 성직자, 사목자라는 사람들이 나이는 먹었지만, 어른도 아닐뿐더러 성숙하지도 않은 어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한 상태로 끌어내리려는 세상의 유혹이나 세력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꼭 세상 탓만일까? 많은 사제나 수도자가 하느님만 나를 알아주시면 그만이라고 하면서도 주변의 인정이나 평가, 장상의 눈에

요한 14,15-21(부활 제6주일 ‘가’해)

이번 주 복음은 지난주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14장의 구절들이다. 지난주 복음이 요한복음 14장의 제1부로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는 말씀이 그 주제였다면, 요한복음 14장의 제2부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주 복음의 주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 사이에 이견이 있을

hospitality(환대)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환대’를 되돌아보고 쇄신해야 한다. ‘환대’는 ‘나 자신 안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라는 뜻이면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고 개방성이며 관대함이다. ‘환대’라는 말이 병든 이를 보살피는 ‘병원(hospital)’, 그리고 여행자와 가난한 이, 외국인들에게 도움과 안식처를 제공하는 ‘피난처(hospice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뜻도 있다. 역시 같은 어근을 가진 ‘host’라는 말에는

글월 문文

‘문文’은 ‘글월 문文’이라고 하거나 ‘등 글월 문’이라 하기도 한다. 글자의 생김새가 등을 돌린 사람 모양이라는 뜻이다. 획수나 모양이 비슷하여 ‘몽둥이 수殳’나 ‘칠 복攵’과 같은 글자로 보기도 하지만, ‘글월 문文’은 역사나 내력을 가진 글자로서 자기 고유의 뜻을 지니고 오랜 세월을 살았다. 신발 치수를 가리키는 말이나 사람들 성姓의 하나인 것을 떠나서 수십 가지의 뜻을 지니면서 일반적으로는 ‘문장文章’이라는

幸福論(행복론) – 조지훈

1 멀리서 보면 寶石(보석)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 데도 없다 幸福(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三間(초가삼간)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 시와 사진 보내준 이-故 성명학

잠잠할 묵默

‘잠잠할 묵默’은 ‘묵黙’과 같은 글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검을 흑黑’과 ‘개 견犬’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개(개 견犬)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인데, 어두운 밤(검을 흑黑)에 검정 개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대충 이해가 간다. 그래서 생겨난 ‘잠잠할/묵묵할 묵默’은 말 없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어쩌면 인생은 깜깜한 밤에 깜깜한 방에서 깜깜한 색깔의 고양이를 잡느라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실 무렵, 제자들과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지낼 때이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제는) 그 길을 알고 있다” 하시는데, 토마스는 “어떻게 저희가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한술 더 떠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수님께서는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뵌 것”이라 답하신다.(요한 14,1-12)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은 해를 거듭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