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지방으로만 알려진 미국 플로리다에서도 계절이 나름 변한다. 9월 말이나 10월쯤 되면 사람들이 ‘지옥 끝, 천국 시작’이라고 부르는 좋은 시절에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이때만 나오는 과일들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반대로 천국이 끝나고 지옥처럼 더운 여름이 될 때면 ‘아, 또 그때가 왔구나!’ 싶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아도 계절이나 사물, 혹은 상황이나 사실이 A에서 B로,
지난주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들은 교회는 이번 주에 루카복음의 마지막 장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듣는다. 지난주 복음인 요한 20,19-31과 대동소이하지만, 서로 보충하고 보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셨다 하는데, 루카복음은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 하셨다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난주에는 토마스 사도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오늘은 토마스 사도가 아닌 열한
유다인의 역사 안에 많은 예언자가 있었으나 그 중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활약한 예언자들로 이사야(기원전 745~695년 50년간 활동), 예레미야(기원전 627~586년 40년간 활동), 에제키엘(대략 기원전 593년~기원전 571년 활동, 560년경 사망)과 같은 예언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엇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어떤 시련이 닥쳐도 당신을 향한 믿음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되고, 그래야만 죽지 않고
간략한 역사: 「성경독서」,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렉시오 디비나」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래된, 성경을 읽는 태도와 자세, 영적 체험이자 영성 수련 및 방법론을 망라한다. 교부 오리게네스(185~253년경)와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Guigo II(?~1188년)에 의해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얼마간 잃어버린 듯한 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렉시오 디비나가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백 년도 넘는 세월 전에 샤를 페기Charles Péguy(1875~1914년)라는 작가가 “현대 사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훼손하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것마저도 훼손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죽음이라는 존엄성이다.(The modern world has managed to debase the thing that is perhaps more difficult to debase than anything else, because it has a singular dignity: death.)”라는 통찰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거의
2024년 4월 3일 수요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교황님과 대중과의 만남인 일상적인 ‘수요 일반알현’이 있었다. 교황님께서는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서 재임 기간 내내 특정 주제 아래 교리 교육을 이어오고 계신다. 이날에는 ‘악덕과 미덕’이라는 큰 주제 아래 진행된 교리교육의 열네 번째 시간으로서 ‘정의’에 관한 말씀을 주셨는데, 교리 교육 말씀 끝에 특별한 순간이 있었다. 교황님께서는 신약과 시편이 함께 엮어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Divine Mercy Sunday)’로 지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린다. 이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하게 된 것은
‘부활 팔일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기 위해 부활절에 시작하여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절정을 이루는 8일간의 축제이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축제 관습은 적어도 3세기나 4세기부터이다. 이 연속적인 축제 기간에 전례의 모든 기도문과 말씀들 역시 부활절인 것처럼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무일도의 찬미가나 시편, 찬가, 후렴 등도 부활대축일의 것으로 사용한다. 교회는 또한 파스카 성야나 적당한 날에 새롭게 세례를
“보고 믿었다.”(요한 20,8)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한 뒤, “어디 묵고 계시냐”며 당신을 따라오는 그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와서 보아라.” 하셨으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라고 하였고, 그렇게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6)라고 복음서의 1장을 기록한다. 그렇게 첫 제자
후배 신부가 예수님께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제자들과의 공개적인 식탁에서 말씀하시고, 실제로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요한 13,26) 하였는데도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한 13,28)라는 구절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했다. 공공연하게 유다를 지목하셨는데도 제자들이 유다의 배반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느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