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5,1-8(부활 제5주일 ‘나’해-생명 주일)

부활 시기를 지내는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서시어”(요한 20,19.26), 우리의 중심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 지난주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는 식으로 당신을 선포하시는 대목 중 “나는 착한 목자다.” 하는 말씀을 들었던 교회는 오늘 부활 제5주일을 맞아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이른바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 관한 내용 하나를 더 듣는다. 당신을 “참포도나무”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면서 “잃은 양”(마태 18,12-14 루카 15,3-7)을 들먹이며 자신은 길을 잃은 불쌍한 양이니 사제인 당신은 끝까지 나를 찾고 붙들어줘야 할 것인데도 왜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만 정신이 팔려있느냐고 ‘들이대는’ 신자들을 지금까지 여럿 만났다. 그런 이들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져 괜히 고개가 숙어진다. 혹 어떤 신자가 결국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이면서도 마을의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기본법칙들(The Basic Laws of Human Stupidity)

by Carlo M. Cipolla(1922~2000년), 1976년 · 제1기본법칙: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우리는 하나같이 주위에 있는 어리석은 개인들의 수를 과소평가한다.(Always and inevitably, everyone underestimates the number of stupid individuals in circulation.) a) 우리가 과거에 합리적이고 지적이라고 판단한 개인들도 나중에는 돌변하여 명명백백한 구제불능의 어리석은 자들인 것으로 드러난다. b) 우리는 매일같이 지겹게도 적절치 않은 장소와 순간에 뜻밖에도 느닷없이 나타나는

“있는 나”·“야훼”·“I AM”·“LORD”(하느님의 이름)

지금이야 사람들이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부르지만, 옛사람들은 하느님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또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입에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몹시 궁금해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물음에 답을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느님께서

요한 10,11-18(부활 제4주일 ‘나’해-착한 목자 주일, 성소주일)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성소聖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사제나 수도자 성소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지를 듣고 기념하는 부활시기를 지내오는 중에 교회는 벌써 네 번째

시편 1편과 돈 보스코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첫 시편 첫 구절에 나오는 인간의 행복은 돈 보스코에게 악에 물들지 않은 청소년의 행복이다. 청소년의

“광주리” 이야기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두고 어떤 형제가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요한 6,13)하다 하는데, 도대체 그 광주리라는 것이 느닷없이 어디서 등장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말 성경에서 “광주리”로 번역하는 것은 대나무나 대나무 껍질 같은 것, 싸리, 버들 따위로 엮은 일종의 용기로서 속이 깊으냐 얕으냐의 정도와 크기로 구분하여 ‘채반, 소쿠리, 바구니, 광주리’ 등으로 불린다. 영어에서는

평화: 선물이요 은총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6) 새해 첫날이나 설날 아침 미사의 독서에서도 듣는 이 축복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평화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임을 보여준다. “주 하느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오니, 정녕 평화를 말씀하시나이다 당신의 백성과 성도들에게, 그 마음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게.”(시편 84,9 최민순 역) 하시는 말씀 그대로

고백록(14)

3611.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만유 안에 현존하시지만 인간 영혼 특히 기억에 현존하신다.-De ordine 2,2,4-5 ‘하느님과 함께 있음esse cum deo’은 인간이 기억을 더듬어 하느님께 지향을 돌릴 적에 의식적으로 실현된다.) 3612. Late have I loved you, O Beauty ever ancient, ever new, late have I loved you. You called, you shouted and you shattered my deafness.(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무일도

죽음과 관련하여 썼던 글 몇 편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동안 ‘죽음’을 두고 썼던 오래된 글들을 뒤적여 한 자리에 모으는 ‘짓’을 한다. 청승일까? 생의 시작에서는 한참 멀어져 이제는 훌쩍 가까워져 버린 죽음이 무의식 속에서 두려워서일까? 세상은 참 스마트해져서 이런 검색도 가능하고, 이런 모음도 가능한데, 이렇게 항상 죽음을 달고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죽는 날까지 생의 정산定算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