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혁革’ 옆에 ‘흙 토土’를 두 개씩이나 포개어 만든 ‘홀 규圭’를 놓으면 발에 신는 신발류를 총칭하는 ‘신(발) 혜鞋’가 된다. ‘홀 규圭’는 일정 영토를 다스리는 제후諸侯에게 천자가 내리는 옥으로 만든 일종의 지휘봉이자 상징물이다. 그러나 ‘신 혜鞋’에서 ‘홀 규圭’는 그 뜻과는 상관없는 소릿값이고, ‘가죽 혁革’이 의미부이다. ‘홀 규圭’의 생김새가 위 끝이 뾰족하고 아래가 네모진 형상임을 고려하여 굳이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아가 1,1) 하는 구절은 성경의 구절이면서도 모든 사랑 노래의 중심 구절이기도 하다. 살만 쉬네르Salman Shneur(1887~1980년)는 입맞춤을 두고 “나의 비둘기여, 우리 유다인들이 어찌 입맞춤하는지 아시나요? 나의 심장과 그대의 심장이 더는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둘 중 누가 숨을 쉬는지 모를 때, 모든 것이
오늘 루카복음은 “(공공연히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공공의 적’과도 같은) 세리들과 (인생길에 낙오자가 된 듯한)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라고 시작한다. 소위 사제들이나 열심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런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모여든 이유는 아무도 찾아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저 판단하고 멸시하였지만, 예수님만큼은 그들을 여느 다른 인간(죄인)과 같은 한 사람으로 보셨기
‘암 암癌’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병상에 기대어 드러누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서 ‘기댈 녁/역疒’이라고도 하고 ‘병질 엄疒’이라고도 하는 글자와 소릿값인 ‘바위 암嵒’이 더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뫼 산山’을 위에 놓거나 아래에 놓아 만들어진 글자 ‘바위 암嵒’은 ‘바위 암嵓’과 뜻과 음이 같은 글자로서 생긴 모양 그대로 산 위나 산 아래에 있는 바윗덩어리들을 묘사했다. 그러고 보면 ‘바위 암岩’은 산 아래에
제8장 사랑을 자극하는 적성適性(affinity, convenance)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흔히, 눈은 보고, 귀는 들으며, 혀는 말하고, 지능은 추리하며, 기억력은 기억하며, 의지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대로 말하자면,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기능으로 온갖 작용과 활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이란 정적情的인 기능, 즉 의지라고 이름하는 이 기능을 통하여 선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고
교회는 ‘가’ ‘나’ ‘다’해를 막론하고 통상 사순 제1주일에는 전례력에 따라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에서 각각 취한 예수님의 유혹에 관한 복음을 듣고, 사순 제2주일에는 역시 같은 식으로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복음을 듣도록 하는데, 사순 제3주일에는 각 전례 주기마다 각각 다른 복음을 듣도록 안내한다. 루카복음을 따라가는 올해 ‘다’해 사순 제3주일에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회개에 관한 복음을 채택하여
성 요셉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한 마디도 남기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 요셉을 공경하는 교회의 전통은 이미 초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05년 율리우스 2세 교황님께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카를로 5세라는 황제에게 주신 편지에도 등장한다는 다음 기도문은 교회 안에서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 기도문을 바치거나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이 기도문을 드릴 때
초대 교회로부터 오랫동안 교회의 삶 안에 자리를 잡아온 『성 요셉 신심은 특히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St. Teresa of Ávila(1515~1582년)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1567~1622년)에 의해 보편화되었고, 교황 비오 9세(Pius IX, 1792~1878년)는 1870년에 성 요셉을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굿뉴스, 성인목록-요셉)』(*이미지 출처-britannica.com) 구약의 파라오는 크게 신뢰하였던 요셉을 기용하여 재상으로 앉히고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창세
「“광야”는 광야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과 그의 의식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닦기”(이사 40,3) 위해 본질적인 것만을 들어야 하는 자리이다. 광야는 바위, 돌, 거친 관목들, 파충류, 메마름, 야수 같은 것들이 횡행하는 곳이다. 4세기에 사막의 교부들이 마귀들과 싸우러 나간다고 했던 광야는 분명한 진실을 뒤엎으려는 거짓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이기심이 드러나는 자리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바오로 사도께서는 전통적으로 필리피서, 콜로새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이라고 불리는 에페소서(총 6장)의 마지막 부분을 “영적 투쟁”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하면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이는 오늘날 “악마의 간계”(에페 6,11) 아래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삶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거듭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곳, 마음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곳은 정확히 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