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문턱에서

*옆의 이미지는 ChatGPT에게 “지혜로운 노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하나를 달라.”고 요청하여 얻은 이미지이다. 내가 한국말로 묻고 있고, 나를 한국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왜 서양 사람의 이미지로 주었느냐고 따졌더니, 「제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 때 사용한 기본 프롬프트(묘사)가 ‘지혜로운 노년’을 특정 인종을 지정하지 않고 요청받았기 때문에, 이미지 생성 모델이 학습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양인(백인 노인)**의 대표적인

한처음에 ChatGPT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컴퓨터의 여러 브라우저가 경쟁하듯 서로 자기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 한다. 낯설었던 AI는 어느새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AI와 검색 엔진이 결합한 대화형 검색 도구들만 하더라도 무척 다양하다. ChatGPT(OpenAI), Gemini(구 Google Bard), Copilot(구 Bing Chat by Microsoft), Perplexity AI, You.com 등과 같은 대표주자들 말고도 유사한 도구들이 넘쳐난다. 그 녀석들에게 “하느님이 과연 계시는가?”를 일일이 물어보았다.

연중 제25주일 ‘다’해(루카 16,1-13 또는 16,10-13)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옮겨와 지내는 곳에서는 https://benjikim.com/?p=15442 에서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구성이 치밀하며 메시지가 분명한 비유가 있고, 복잡하면서도 직설적이지 않아서 주도면밀하게 메시지를 찾아내야만 하는 비유도 있다. 루카복음 제16장에는 돈과 재물에 관한 태도를 두고 루카만이 전하는 두 개의 비유가 담겼는데, 그중 이번 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루카 9,23-26)

※ 여러 단편 자료를 수집하여 영적 독서 자료로 ‘강해’를 대신합니다. 2025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이에 보충하여 <정재원(정약용 선생의 부친)을 중심으로 한 가족도와 초대 교회 신앙삼각지>라는 글도 https://benjikim.com/?p=6144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4년 대축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중심으로, 2023년 대축일은 성 정하상 바오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으며 아래 링크에서 이를 각각 확인할 수 있음도 알려드립니다. https://benjikim.com/?p=11529(2024년)

오늘날의 순교

황제의 숭배를 강요했던 고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공개적인 처형이나 화형, 맹수의 밥으로 던지는 등의 잔혹함 자체였다. 형세가 역전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이단을 척결한다는 소위 종교 재판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과 결탁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종교적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20세기가 되면서는 “종교가 아편”이라고 규정한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이상한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하면서 종교 활동이 제한되거나 파괴되었고, 종교인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쥐도

성낼 분憤‧忿

‘분노’라는 말을 한자어로 찾으면 ‘성낼 분憤’을 써서 ‘분노憤怒’라고 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분忿’이라는 글자를 써서 ‘분노忿怒’라고 쓴다. ‘분憤’이나 ‘분忿’은 전혀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같으므로 서로 통용이 되는 ‘통자通字’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도 ‘분노’를 검색하면 憤怒·忿怒라는 한자어를 나란히 기록해준다. ‘분노’는 속에서 화증火症이 치밀어오르는 것이고, 심하면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므로 비틀려 질질 나오듯 어느 순간 자아낼 수밖에 없고, 참다못해 버럭 성을

교육에 관하여(로마노 과르디니)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1885~1968년)는 이탈리아 태생의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 개혁자로 알려진다. 그의 저서 중에서는 「거룩한 표징」(장익 역, 분도출판사), 「미사, 제대로 드리기」(김영국 역,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삶과 나이 – 완성된 삶을 위하여」(김태완 옮김, 문학과지성사), 「주님의 기도」(가톨릭 출판사, 안소근 역),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요한복음의 고별 담화와 요한 1서의 묵상과 사색」(성서와함께, 김형수 역),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신애론(12)

제17장 우리는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 본성상으로는 지니고 있지 않다 독수리란 놈은 심장이 매우 크고 힘이 세어서 높이 나른다. 그러나 높이 나르는 것보다도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시력을 지니고 있어서 날개깃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요원하게 시야를 넓힌다. 이와같이 하느님께 대한 자연 본성적이며 거룩한 경향에 자극되어 생기를 얻은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신성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요한 3,13-17)

거룩한 십자가의 승리(축일의 공식적인 영어 이름: The Exaltation of the Holy Cross)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라 4세기경부터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져왔다는 오래된 축일로 알려진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를 때 세 가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326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께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발견한 사건, 335년 예수님의 무덤 위에 부활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한

십자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바라만 보거나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탁상공론이나 벌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불편한 스캔들이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참조. 1코린 1,23)이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유와 표징들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7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유혹은 되풀이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십자가를 둘러싼 논리가 비인간적이거나, 고통을 그릇되게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비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