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3,33-37(대림 제1주일 ‘나’해)

“조심하고 깨어”(마르 13,33), 부분화, Joseph the Carpenter by Georges de La Tour, 1642년, 루브르 *아래 그림 참조-출처 wikipedia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나’해 대림待臨 제1주일이다. 대림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성탄을 앞두고 참회의 기간을 가졌던 관습이 생겨났던 4세기 말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대림 시기 거행은 6세기 이후부터 로마에서 전례에 도입되면서부터이다. ‘대림’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온 것으로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므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해마다 대림 시기에 구세주를 기다리며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의 기다림이라는 두 차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하는데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네 개의 초는 구세주를 기다렸던 구약의 4천 년을 뜻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비롯한 성경의 ‘사십’과 관련한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는 제대 앞에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밝힘으로써 구세주께서 좀 더 가까이 오셨음을 의식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준다. 대림 시기 동안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는다.

복음의 내용은 일명 ‘작은(小) 묵시록’이라고 불리는 마르코 13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시작 부분에 “예수님께서 성전 맞은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따로 예수님께 물었다.(마르 13,3)”하는 것으로 보아 말씀을 하신 장소와 대상에 관하여 전후 사정이 짐작된다. 문맥상으로 4 제자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마르 13,37)”에 따라서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하신 말씀으로 확대된다.

1. “그 날과 그 시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현재의 창조를 끝내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일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를 제외하고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히브 4,15)이신 예수님도 모르신다고 한다. 인간이 기다리고 있든 기다리고 있지 않든 “그 날과 그 시간”이 갑작스럽게 온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온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물론 그러한 날과 시간이 오고 있음을 식별할 수 있는 표징들과 징후들은 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듯이”(마르 13,28) 믿음의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들을 깊이 읽으면서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고”(마르 13,29),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리도록, 그리고 갑자기 맞이하지는 않도록, 그러한 비유의 가르침에 이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신다.

2. “조심하고 깨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 13,33) 하신다.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3,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마르 13,9) “너희는 조심하여라.”(마르 13,23) 하고 거듭하여 세 번이나 “조심하여라” 하신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네 번째로 한 번 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하신다. 그런데, 이 “조심하라”는 말에 덧붙여진 “깨어 있으라”라는 말은 이후에 곧바로 연달아 망치질하듯이 세 번이나(34.35.37절) 반복된다. 그리스도인의조심’은 ‘깨어 있음’이다.

조심하고 살피며 깨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싸움에서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무감각, 무기력, 믿음의 확신에 대한 졸음, “사랑이 식어가는 것”(마태 24,12)들에 대한 투쟁이고 싸움의 연속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너희는 새겨들어라.”(마르 4,24),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혹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르 13,23) 등에서도 똑같이 예수님께서 “조심하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조심하고 살펴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이야말로 역사에 진정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의 재림을 확신하도록 원하신다. 바오로 사도 역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3,11)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졸음을 떨치고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다그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시오. 육신이 잠들 때 우리 본능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때 우리의 활동은 의지에서가 아니라 본능의 충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영혼이 깊은 잠에 빠질 때, 즉 소심이나 우울함에 빠질 때 원수가 그를 지배하고 영혼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충동이 우리 본성을 지배하듯이 원수가 영혼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과 영혼 둘 다 모두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육신은 잠에서 깨어 있고 영혼은 게으름과 소심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의인들이여,)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1코린 16,13) “영으로는 (일어나)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1코린 5,3 콜로 2,5)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2코린 4,1) 하였으니, 과연 여러분에게 맡겨진 직분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여러분은 낙심하지 마십시오.(성 에프렘 부제St. Ephraem of Syria, 306?~373년, ‘디아테사론 주해’에서-대림 제1주간 목요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3. “먼 길을 떠나는 사람…종들…문지기”

예수님께서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로 시작하는 간단한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마르 13,34)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상 제자들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얼마 되지 않아서 잡히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공생활을 마치시며 제자들이 주님 없이 지내게 될 상황이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이지만, 제자들은 각자 사명과 임무를 부여받게 될 것이며 그중에는 문지기의 역할을 맡아서 공동체가 깨어 있도록 하는 사람도 있게 될 것이었다.

“각자에게 할 일”이 맡겨지고 서로 다른 책임이 주어질 것이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복음의 다른 곳에서 늘 다른 열한 제자와 베드로를 구별해서 기술하려고 하듯이 여기서도 “문지기”를 따로 거론하는 것은 충분히 베드로 사도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문지기”의 책임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라는 말씀처럼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막중한 책임이다. 그의 책임은 깨어서 집을 지키는 것이고, 집 안에 있는 이들도 지켜야 하는 책임이다. 바깥 세상과 연결된 문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사람이 문지기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라도 오실 수 있는 분이다.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마르 13,35), 졸고 있거나 다시 깨어나기 전일지도 모른다.

집주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체포와 수난, 그리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당신과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니 동산에 가시어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기도”와 “괴로움”을 함께 나누자고 하셨을 때 그 제자들마저 “깨어 있어라” 하는 예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자고 있었던”(참조. 마르 14,32-42) 저녁 시간에 올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대사제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던(참조. 마르 14,66-72) 한밤중에 올 수도 있으며, 여인들이 빈 무덤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음에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던(마르 16,1-8) “매우 이른 아침” 새벽 시간에 올 수도 있다. 이 시간들은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라” 하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계시의 시간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모두 이 시간에 깨어 있지 못했다. 마르코는 이러한 시간들을 일일이 지적하듯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쁜 소식,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를 선포하고 알려 주라는 내용,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불림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갈릴래아에서 진행될 모든 일은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에 의해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부르심을 받을 것이었다.

밤중에 깨어 있는 것,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에서처럼 제자들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모두에게 맡겨진 임무이다. 하지만 특별히 “문지기”에게 맡겨진 임무는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이사 21,11) 하는 말씀처럼 파수꾼이 되어 주님의 집을 수호하고 집에 사는 식구들이 모두 졸거나 잠을 자지 않도록 하는 임무이다. 어떤 의미에서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목자에게 하는 질문일 수 있지만, 어떤 때 목자들은 깨어 있지 않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임무에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자고 있는 예도 있다.

예수님께서 4 제자들(위에 언급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안드레아, 참조. 마르 13,3)에게 하신 질문,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마르 14,41) 하는 질문은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마르 13,37)에서 보듯이 4 제자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싶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조심하고 깨어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진정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7) 한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체사레아의 대 바실리오 성인(St. Basil the Great, 330~379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언제일지도 모르면서도 주님께서 오실 것을 알고(참조. 마태 24,44 루카 12,40) 매일 매시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완수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것입니다.(윤리 규칙서, 80.22)』라고 하셨다. 사막의 교부들도 『우리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사막 교부들의 말씀, 포에멘 교부, 135)』라고 하였다. 이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깨어 있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의 기본임을 알고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밤중에도 깨어 있으면서 몸과 정신이 게으름과 졸음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며 기다리는 깨어 있음을 살아야만 한다. 어떤 경우라도, 깨어 있음은 비록 간혹 졸음에 빠지더라도 사람들과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와 함께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말한다. 깨어 있음은 감각을 일깨우고 영적인 무감각을 물리치며 믿음에서 주어진 지식이 언제나 부족함을 알면서 사는 것이고, 깨어 있음은 현실에 충실하고 이 땅에 성실하면서도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역사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의 몸 안에 사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며, 깨어 있음은 ‘다들 그렇게 하잖아!’ 하는 식으로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비판 정신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교’를 지칭하는 비숍bishop(라틴어)이라는 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어 에피스코포스ἐπίσκοπος(episkopos)라는 말에서 기원하는데, 이 말을 현대어로 감독이나 관리자를 뜻하는 수퍼바이저supervisor 정도로 생각하지만, 원래의 뜻은 말 그대로 “깨어 있음”(overseer, watching over)이다.(ἐπί‎=over+σκοπός‎=watcher, lookout, guardian) 이 말은 주교 혼자만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고, 주교에게 맡겨진 이들도 깨어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교의 임무는 졸리고 잠자는 이들을 깨워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온 교회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도록 해야 하며,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 하고 말하여라.”(묵시 22,17) 하는 말씀대로 자신의 기도를 성령의 기도에 일치하도록 해야 함은 분명하다. 주교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모든 이들도 이처럼 성령의 ‘오십시오!’를 따라서 계속 온 힘을 다하여 ‘오십시오!’를 기도하면서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감싸 주시도록 청해야 한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문으로 성경을 덮고 그 말씀 안에 잠겨야 한다.

보라, 내가 곧 간다.”(묵시 22,12)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

대림 제1주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15,1-3: PG 33,870-874)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오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합니다. 한 가지 오심만이 아니라 첫 번째 오심보다 한층 더 빛나게 될 또 다른 오심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로 오실 때에는 고통과 인내심 가운데 오셨고, 두번째 오실 때에는 하느님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대부분 이중적입니다. 그분의 탄생이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시간이 생기기 전 하느님으로부터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찼을 때의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입니다. 그분의 강림도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양털 위에 내리는 이슬 같은 은밀한 강림이고 다른 하나는 장차 밝히 드러날 강림입니다.

첫 번째로 오실 때 그분은 강보에 싸여 구유 위에 누워 계셨고 두 번째 오실 때에는 빛을 겉옷 삼아 입으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오실 때에는 십자가를 지고 치욕을 당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영광 속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첫 번째 오심만을 생각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두 번째 오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첫 번째 오실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라고 우리가 말한 것을 그분이 두 번째 오실 때에는 천사들과 더불어 마중 나가 경배하면서 되풀이할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다시 재판 받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을 재판정에 불렀던 이들을 심판정으로 부르러 오실 것입니다. 첫 번째 오셔서 재판 받으실 때 침묵을 지키셨던 그분은 십자가에서 무엄하게도 모욕했던 이들에게 그 모욕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을 했어도 나는 잠자코 있었노라.” 첫 번째 오실 때 주님은 당신 자비의 섭리에 따라 온유한 설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셨지만, 장차 다시 오실 때에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의 왕권에 복종케 하실 것입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이 두 가지의 오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이것은 첫 번째 오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 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깨끗하게 만들리라.”

바오로 사도도 디도에게 이 두 가지 오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줍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이 말씀에서 바오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번째 오심을 말하고 우리가 고대하는 두번째 오심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전해 받은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날 무렵 마지막 날 영광 속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끝을 고하고 창조된 이 세상은 다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