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월요일(요한 12,1-11)

예수님께서는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다시 살려주신 라자로 3남매가 있는 베타니아로 가신다. 식사 중에 마리아는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린다. 제자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핑계로 향유의 값을 계산한다. 예수님께서는 “늘 너희 곁에 있을 가난한 사람”을 언급하시며 당신의 장례를 암시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도 보려고 밀려든다. 예수님을 믿는 무리가 늘어나자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한다.
1. 눈물로 시작되는 성주간
성주간, 곧 수난 주간은 베타니아,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친구들이었다. 베타니아에서 예수님은 집에 온 듯 편안함을 느끼신다. 그분은 늘 이런 친구들을 필요로 하셨고, 특별한 환대를 필요로 하셨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대담함과 여성성, 그 부드러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신다.
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린다. 거기에는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는 깊고 순수한 감성,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모습을 못마땅해 했다. 유다는 “이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어야 했다!”라고 외치며 가난한 이들을 이용한다.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을 편들지 않는다.
바흐의 수난곡에서 이 ‘향유’는 문자 그대로 ‘물’로 번역된다. 바흐는 이 향유를 ‘눈물’로 해석한 것이다. 수난은 이렇게 예수님 위에 눈물을 쏟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마리아의 눈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죄를 깨달은 참회하는 교회의 눈물이며, 겸손한 교회의 눈물이다. 예수님의 발치에 머무는 교회,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아볼 줄 아는 교회의 눈물이다.
베드로가 배반하고 닭이 울 때 흘린 눈물보다 먼저 마리아의 눈물이 있었다. 이 눈물은 예수님을 파스카 신비 속으로 이끄는 눈물이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눈물이며, 우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눈물이다.(프랑코 마스트롤로나르도Franco Mastrolonardo 신부)
2. 무상성(Gratuity)의 낭비
성 월요일 복음은 식사 이야기로 시작된다. 파스카 엿새 전, 예수님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이 세 남매는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기에 이는 친구들의 저녁 식사이다. 수난의 시간이 며칠 남지 않은 때, 마리아는 파격적일 만큼 아름다운 행동을 한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성경은 대화가 아니라 ‘몸짓’을 기록한다. 이는 사랑이 늘 논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임을 암시한다. 사랑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바를 때 보여준 무한한 부드러움이다. 유다의 눈에 그것은 ‘허비’이며 쓸모없는 짓이다. 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논리로 말한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우리 역시 얼마나 자주 똑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교회를 향해 이런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듣는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사랑은 언제나 ‘낭비’다.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발을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난한 이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을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저 배를 채워줘야 할 ‘민중’으로만 여기게 된다. 빵은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인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봉쇄 수녀원은 ‘낭비’이고 선교 수녀원은 ‘매우 유용하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하는 것(doing)’이 ‘존재하는 것(being)’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단순히 사랑을 ‘행하는 것’보다 사랑 그 자체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진실로 파스카 며칠 전 베타니아의 집에서 일어난 이 큰 가르침은, 장차 십자가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낭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좋은 향유로 가득 찬 항아리이시다. 죽음을 통해 깨어진 그 항아리는 온 세상과 역사 속에 하느님 자비의 향기를 퍼뜨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가 없는 무상성의 낭비’다.(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Luigi Maria Epicoco 신부)
3.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 찾기
이 복음 구절은 한 가지 관찰로 끝납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2,10-11) 며칠 전 보았듯이 유혹은 단계를 밟아갑니다. 처음에는 유혹과 환상으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커지고, 전염되고, 합리화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생명의 증인인 라자로까지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예수님의 한 말씀에 머물고 싶습니다. 파스카 엿새 전, 수난의 문턱에서 마리아는 관상의 몸짓을 합니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마리아는 관상의 문을 엽니다. 유다는 돈과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요한 12,6) 이 불충실한 관리인의 이야기는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높은 자리에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선 단체나 인도주의 기구들을 보십시오. 직원이 너무 많고 구조가 비대해서 결국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40%뿐이고, 60%는 직원들의 월급으로 나갑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돈을 빼앗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요한 12,8) 이것은 진리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가난한 이들은 아주 적은 부분일 뿐입니다.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숨겨진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부정주의(negationism)에 빠진 ‘무관심의 문화’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니야, 그렇게 많지 않아, 안 보이잖아”라고 부정하며 현실을 축소합니다.
또 무관심의 문화에 빠지지 않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도시의 ‘장식품’처럼 여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동상처럼 “그래, 저기 있네. 구걸하는 할머니가 있네”라며 마치 그것이 도시 풍경의 당연한 일부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경제 정책과 금융 정책의 희생자들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부를 쥐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빈곤에 허덕입니다. 이것은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의가 낳은 희생자들입니다.
또한, 한 달을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는 가난한 이들도 많습니다. 몰래 자선 단체인 카리타스에 가서 도움을 청하며 수치심을 느끼는 중산층 빈곤층도 많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보다 훨씬,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됩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보고 있습니까? 그 현실을 알아챕니까? 특히 한 달을 살기 힘들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그 숨겨진 현실을 말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수년째 비어 있던 버려진 공장 건물에 최근 몇 달 사이 열다섯 가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보니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공장 한 구석씩을 차지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집집마다 중산층이 쓸 법한 좋은 가구와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집세를 낼 돈이 없어서 그곳으로 온 것입니다. 집세를 못 내서 집을 떠나야 했던 ‘새로운 빈곤층’입니다. 경제적, 금융적 조직의 불의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 때 그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지냈느냐? 먹을 것을 주었느냐? 감옥에 있을 때 찾아갔느냐? 병원에 있을 때 보러 갔느냐?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느냐? 거기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린 사치나 여행, 사회적 지위로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방치한다면, 주님께서도 심판의 날에 나를 무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신 것은, “내가 가난한 이들 안에 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내가 거기 현존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2020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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