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4,5-42(사순 제3주일 ‘가’해)

요한 4,5-42(사순 제3주일 ‘가’해)

“어디에서 그 생수를?”(요한 4,11)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시기를 현재의 사순 제3주일부터 3주간만을 지냈고(성주간을 포함하면 4주간), 이 기간을 새로운 영세자들을 위한 집중적인 세례 준비 기간으로 지냈다. 통상적으로 사순 제3주일은 세례 준비자들을 위해 첫째 수련식을 거행하는 주일이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부터 지내는 이후 주일의 복음 주제들과 잘 어울린다. ‘다’해를 제외한 ‘가’, ‘나’해에는 이후 3주간 동안 요한복음으로 주일 복음을 듣는다. 올해인 ‘가’해의 사순 제3, 4, 5주일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샘)→태생소경의 치유(그리스도는 우리의 빛)→라자로의 부활(그리스도는 부활이시며 생명의 주인) 순으로 복음 내용이 전개된다. 이렇게 이번 주부터 이어지는 3주간의 상징어들을 열거하면, “물”→“빛”→“생명”이다.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더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생명수의 은총에 대한 계시를 만나게 된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신다. 아브라함의 종과 레베카의 만남(창세 24,11-14), 야곱과 라헬의 만남(창세 29,9-11), 모세와 미디안 땅에 살던 사제 르우엘의 딸들과의 만남(탈출 2,15-22) 등 구약성경에서도 우물이라는 배경 아래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각각 다른 형태로 만난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계곡을 따라 유다 지역으로부터 갈릴래아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시는 여정 속에 계신다. 그런데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만) 했다.”(요한 4,4)라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길을 잡으신 까닭은 비단 지리적인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뿐이 아니라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께 순명하기 위해 거룩한 지향으로 그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명은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하고 몸소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과는 분리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거부하며 그리짐이라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지었던 사마리아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하던 이들까지도 만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결정과 행동은 장벽을 허물고자 하신 것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는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요한 8,48), 즉 이스라엘인으로부터는 배신자요 변절자라는 비난이나 모욕, 그리고 고발까지도 감수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 있었 오랜 불목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南과 북北으로 갈라지는데, 사마리아가 포함된 북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아시리아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혼혈로 만들어 남왕국이 보기에 사마리아는 이방인의 지역이 된다. 예루살렘이 포함된 남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게 점령을 당하지만,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바빌론은 다시 기원전 550년에 페르샤에 점령을 당하는데,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샤 왕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7년에 칙령으로 바빌론에 억류된 유다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한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을 허용한다. 이때 유다인들 중에는 70년 이상 억류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나름대로 족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이미 북왕국이 민족의 순수 혈통을 잃었다고 북왕국을 멸시하던 남왕국 유다인들은 성전 재건축에 비용을 보태겠다는 북왕국 사람들의 호의를 무시하였고, 이에 북왕국 사람들이 기원전 432년경 모세가 율법을 선포했다고 알려지는(신명 27,12) 그리짐 산에 별도의 성전을 짓게 되면서 두 지역 사람들 간의 골이 깊어진다. 북왕국은 모세오경만을, 그리고 남왕국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비롯하여 시편까지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유다인인 예수님께서 적대 관계로 결코 지나실 수 없는 “사마리아를 가로질러”(4절) 가시고, 결국 사마리아 지역에서 “이틀”(40.43절)을 체류하신다. 이는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된다. 이야기는 “물”과 목마름으로 시작하여 “양식”(31-38절)에 대한 주제를 거쳐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42절)로 마감된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10절),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19절),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25절),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29절),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42절) 이 구절들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읽으면 여인과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아요 구세주로 알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구세주로 알아 모시는 삶의 여정을 산다.

  1.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참조. 창세 33,18-20)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한참 더운) 정오 무렵이었다.”(요한 4,5-6) 피곤하고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목이 말랐지만, 두레박이나 다른 수단이 없어서 물을 길을 방도가 없었다. 우물은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우물은 대지의 저 깊은 속마음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시원한 생수를 보존한다. 우물은 홀로 있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선물이며 겸손하고 자유로우며 관대함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우물은 파고 퍼내는 수고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물은 깊이를 선뜻 짐작하지 못할 만큼 신비스러움을 지니는 조용함의 상징이다. 그런가 하면, 우물은 어느 공동체에나 활력의 매듭이 되고 만남의 자리가 되며 삶이 어우러지는 터전이고, 누군가는 물을 부탁하고 또 누군가는 내어주는 곳이다.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있는 자리이며 낯선 이가 친구가 되는 자리이고 여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마치 남자들이 마을의 광장이나 성문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여인들은 우물가를 맴돈다. 우물은 사람들에게 사회생활의 가능성, 경험과 소식의 나눔, 참여와 연대의 결의, 일상사 작은 얘깃거리들의 교환, 즉 기쁨·슬픔·문제·걱정·욕망·꿈·호기심 같은 것들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우물은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들과 연결되는 자리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만나는 자리이며, 노동과 여가가 함께 하는 자리이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요한 4,7ㄱ) 아마도 자신의 정숙하지 못한 행실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을 받지 않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없는 가장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우물에 온 것일 터였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모든 체면이나 권위를 내려놓고 거지처럼 구걸하며) 말씀하셨다.”(요한 4,7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내면에 있는 샘물을 퍼 올리기 위해 펌프의 ‘마중물’처럼 먼저 다가가 “물을 좀 다오” 하신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요청하시며 여인에게 말문을 여신다. 지극히 평범한 요청이었지만, 그리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유다인과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 더구나 집밖에서 외간 여자와 말을 나누는 것이 금지되다시피 한 상황, 남성 본위 사회에서 열등하게 취급되던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선입견, 편견, 인종차별, 성性 차별, 지역 차별을 타파하신다. 제자들마저 이를 보고 매우 “놀랐다.”(요한 4,27)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목이 마르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그러한 파격적인 겸손의 태도를 보면서 놀라고 의아해하면서 예수님께)…‘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8-9)라고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한다. 대화의 물꼬를 그렇게 되받아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즉시 다른 차원의 시야를 제시하신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한 꺼풀씩 내용이 벗겨져 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가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하신다. 예수님께서 상황을 바꾸신다. 여인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조금 부드러워진 어투로 “두레박” 타령을 하고 조상 야곱을 들먹이며, 조금은 더 존경심을 품은 듯이 또다시 반문한다. 그리고는 여인의 입장이 요청을 받았던 처지에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하고 요청하는 처지로 뒤바뀐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여인에게서처럼 늘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실지 모르는 여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인 토라, 율법의 상징인 우물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갈증보다 더욱 깊고 본질적인 갈증이 있다는 것을 단언하듯이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불륜을 저지르고…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던”(호세 2,7) 사마리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여인이 사마리아처럼 그릇된 방법, 곧 여러 남자를 바꾸어가며 온갖 더러운 물로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지만, 그녀를 책망하시거나 단죄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 주님께 돌아가자.”(호세 6,1) 하시듯이 “살아계신 주님”(예레 16,14)께 돌아가자고 초대하신다. 예수님의 초대에 여인은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이 물”(요한 4,14), 다시 목마르게 될 물, 모세의 가르침일 뿐인 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셔서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요한 4,14) 그 물을 오히려 예수님께 청하면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자신 안에서 결코 다함이 없는, 마르지 않는 물이 솟는 샘이다. 왜냐하면 그 샘은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7-39) 하신 그대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9,30.34-신 포도주와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1.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던 예수님의 간청이 이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는 여인의 청원이 된다. 그렇지만 여러 남편과 주인이 있었으면서도 참된 반려伴侶나 신랑이 없었으며 진정한 일치와 통교가 없었던 여인으로서는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만 했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하시는 예수님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한 4,17)라고 대답하는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가면서 여인은 마침내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 4,19-20) 한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차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인지 가리짐인지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하시면서 예배의 장소가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몸 안임을 밝히신다. 바오로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2코린 13,5)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하면서 누누이 이를 강조하던 바로 그 성전이다.

여인이 “당신이 뭔데?”라고 했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진실을 직면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직면하도록 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즐기신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찌르실 때, 인간은 설령 자기 입으로 내뱉어 고백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시편 139,1-7)라고 하던 시편 작가의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심 이런 심정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19절)라며 놀라 외친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 안에서는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발견과 하느님을 아는 깊은 지혜가 동행한다. 결국, 하느님 앞에 선 인간들의 질문은 ‘과연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도 『당신을 알아 저 자신을 알고, 저를 알아 당신을 알아 모시거늘…』이라고 기도했다.

  1.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 하시자 여인은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4,25)라고 응답하는데, 이처럼 여인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깊은 갈증, 곧 메시아에 대한 목마름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확실한 도약을 위해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며 자기를 밝히시고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한 6,20;8,24.28.58;13,19 등에서처럼 당신의 신적 본질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신 “나다”라는 표현 방식을 당신께 적용시키신다.(탈출 3,14-15 호세 1,9)

예수님을 만나 여인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그리고 증인이자 복음의 전파자가 된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요한 4,29) 하며 외치고 자신이 메시아, 온갖 은총의 샘이신 분을 만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요한 4,39)을 한다. 이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도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신 성령,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분을 증언하도록 하는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요한 4,14),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솟아 나오는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요한 7,38) 샘을 식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으로(39절)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으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직접 듣고”(요한 4,42) 충만한 믿음에 이른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유다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나를 막론하고 메시아가 되신다.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아멘!
[출처] 요한 4,5-42(사순 제3주일 ‘가’해)|작성자 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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