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7)

제7장
거룩한 섭리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총을 분배하여 주고 있으니. 그 거룩한 섭리는 얼마나 경탄할만한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영원한 섭리에는 한가지 비교할 수 없는 특전이 있으니, 이것은 여왕들 중의 여왕이시며, 아리따운 사랑의 어머니시며 지극히 뛰어나게 완전하신 성모님, “언제까지나 영원한 여왕”(이사 47,7)이신 성모님을 위한 것이다. 물론 특별한 은혜를 입은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전선하신 하느님은, 인류와 천사들에게 풍성한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하여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리시는”(마태 5,45) 분의 은총을 입어, 모든 이가 다 빛을 받았으며, 이 빛은 각 사람을 밝혀 주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각자는 자기 몫으로 씨앗을 받은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은 옥토에뿐 아니라 한길 위에나, 가시덤불 속에나 바위 위에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참조. 마태 13,5-8), 만일 각자가 자기 구원을 위한 이 지극히 풍성한 구속 은총을 이용치 않는다면, 구세주 앞에서 도무지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테오티모여, 은총의 이 지극히 풍성한 충족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고, 그 은총에 있어서는 우리가 모두 평등하여 풍성한 강복이 우리 모두에게 내린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의 다양성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은 은총의 다양성 안에 있는 위대성과 위대성 안에 있는 다양성, 어느 것이 더 경탄할 만한 것인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스도인들 간에 있는 이 구원의 수단이 야만인들 사이에서보다 더 위대하고 효과적이라는 것과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사목자가 더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되고 거둘 수 있는 민족이나 도시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이제 이러한 외적 수단은 하느님의 섭리가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영혼들의 구원과 완덕에 유효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착하심에 배은망덕 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흔히 보는바, 이 외적 수단이 많을 때에는 내적 수단은 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잘 성공케 한다는 참된 경험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완전히 똑같은 자연 본성적 은혜를 두 사람이 받는 것을 볼 수가 없듯이, 초자연적 은총에 있어서도 이와 같아서, 전혀 같은 은총들을 똑같이 받지는 않는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와(신국론, XI장 9, 16 및 XII장의 9, 여기에 인용된 성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은 그가 명백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다만 함축적으로 의미된 것뿐이다) 성 토마스의 말씀(신학대전, Ia. Q, 62, a,6)을 빌리면, 천사들도 각각 자신의 본연의 상태의 다양성을 따라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다 제각각 종류가 다르든가, 아니면 적어도 서로 구별될 수 있을 만큼 다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수에 따라서 그만큼 상이한 성총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은총이란 사람들의 자연적 조건을 따라 주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관대함의 그 감미로움을 따라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은총의 생산을 기뻐 즐기면서 하느님의 그 인자하심은 그 은총을 무한히 다양화시키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다양성은 당신의 구원과 자비하심의 아름다운 광택이 되게 하시며, 교회는 이에 대하여 모든 주교 증거자의 축일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저와 비슷한 이를 만나보지 못하였노라.”(집회 49,14) 또한 하늘에서는, “그 이름을 받은 자 이외에는 아무도 그 새 이름을 아는 이가 없다.”(묵시 2,17)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는 이들은 구세주께서 얻어 주신 영광의 새로운 존재를 따라서 각자 제 나름의 독특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제 나름대로 독특한 은총을 받으니, 성총이 다 상이한 것이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당신의 은총을 진주에 비교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3,45), 플리니우스가 말하듯이(Nat. Hist. 9 장 35절, 56절), 진주란
단일체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각각 그 품질이 독특하고 서로 같지 아니하여, 둘이 서로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별과 별 사이의 영광이 서로 다르듯이(참조. 1코린 15,41), 사람도 각각 그 영광이 다르며, 그 명확한 표는 그들이 받은 은총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은총에 있어서의 이러한 다양성, 또는 이러한 다양성을 띤 은총이란 것은 지극히 거룩한 아름다움과 가장 흐뭇한 조화를 구성하게 되며, 천상 예루살렘의 온 도시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저 지극한 예지는 어찌하여 어떤 이에게는 은총을 태워주시고 다른 이에게는 아니 주시며 또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이에게보다 훨씬 더 많이 주시는가 하고 함부로 캐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테오티모여, 결단코 이러한 호기심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우리 모든 이는 구원되기에 필요한 은총을 아주 풍성히 다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들보다 더 풍요한 은총을 즐겨 베푸시는 것을 보고, 어찌 누가 감히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참외들 딸기보다 더 크게 만드셨으며, 백합화를 오랑캐꽃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것으로 만드셨으며, 어찌하여 로즈마리Rosemary는 장미가 아니며, 또 어찌하여 패랭이꽃은 금잔화가 못 되는지 또 어째서 공작새의 수놈은 박쥐보다 아름다우며, 또 무화과는 달콤하고 레몬은 시큼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 남들은 그러한 사람을 비웃으며 이르기를 “참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상이성과 불평등성이 사물에 있어야만 서로 구별될 수 있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으며, 또 쓴 것도 있고 단 것도 있으며, 더 아름다운 것도 있고 보기에 덜 좋은 것도 있는 이유인 것이다.
초자연계에 있어서도 이와 똑같다.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1코린 7,7)라고 성령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가 왜 성 베드로의 은총을 가지지 못 했느냐고 묻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며, 또 성 안토니오St. Antony는 왜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 같지 않았으며, 성 아타나시오는 왜 성 예로니모St. Jerome가 아니냐는 것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니, 교회는 무수한 꽃이 만발한 동산과도 같으므로 그 꽃들은 크기와 색깔과 향기 등에 있어서 각각 다른, 말하자면 여러 종류의 완전성을 갖춘 꽃들이 있는 것이고, 모두가 다 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제 나름의 매력과 색채와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다른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았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의 가장 훌륭한 완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