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주는 내 몸”(루카 22,19)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 대목은 마태 26,26-29 / 마르 14,22-25 / 루카 22,14-20 / 1코린 11,23-26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시며 말씀하신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내 몸, 내 계약의 피” 코린토 1서는 “내 몸,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고 하는데, 유독 루카복음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라 하면서 “내어주는”이라는 말씀을 붙인다.

‘내어주는’이라는 말은 성경의 언어인 희랍어에서 ‘디도메논(διδόμενον, didomenon)’이라는 말로서 영어로는 ‘주어지는(given)’이라고 옮겨진다. 성체성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앙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인간에게 건네진’, 주어진 신비이다.

이 신비 앞에서 사람들은 처음에 그저 매일 먹는 빵 정도의 얘기로 생각하고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할 정도로 솔깃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속되는 말씀에 대부분 사람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수군거리기 시작”(요한 6,41) 하더니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벌어져 서로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그리고 많은 이가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요한 6,60) 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말씀을 두고 투덜거렸다.”(요한 6,61) 그리하여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학적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밝히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며, 감각과 이성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하려는 욕심으로 감각의 확증과 경험주의적 세계관에 매몰되면서 감각과 이성의 한계 안에만 머물고 싶어 하며, 모든 것을 자기 논리로 설명하려 든다. 이 상황에서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은 자칫하면 영적 성장이 더뎌지거나 멈추는 것을 방치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척도로 환원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하며, 고통이라는 유령을 만나 뒷걸음질을 치기도 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은 인간의 자연적 시각 능력을 무한히 뛰어넘는다. 하느님의 신성은 늘 인간의 이해 능력 범위를 넘어선다. 그런데, 죄로 상처 입은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신성을 지각하는 능력에도 상처를 입어 손상되었다. 신앙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빛이니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인간의 시각 범주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하느님은 진리이시므로 객관적으로는 분명하지만,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주관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를 신앙의 신비라고 부른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 신앙의 확실성에서 동기를 부여받고, 모호함에 이끌려 하느님께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 사랑이신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관계의 사람이 되고, 자녀다운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지으셨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 선 사람들은 분명히 갈린다. 인간적인 논리와 자기 이익을 추구하던 많은 이들이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서 그리스도를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둘레에 있던 열두 제자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하고 물으신다. 그렇지만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사도들을 대표하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성체성사의 신비를 모두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형제 앞에 다가온 상상할 수 없는 신비를 우선 인정하고 믿어 고백한다. 물론 그 형제 중 하나였던 배반자 유다는 “빵을 받은 뒤에 곧 밖으로 나갔다.”(요한 13,30) 스승을 등진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5)

일흔다섯 늙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일단 하느님을 믿었기에 살던 곳을 떠나 타지에서 정착했던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얻은 아들마저 봉헌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하느님의 요청에 피눈물을 머금고 동의하며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창세 22,10) 하는 모리야 산의 순간에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믿음의 조상’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완성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자신의 믿음이 정화되고 드러나는 순간을 맞는다.

나의 이해 범주 안에 완전히 포획되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감각과 이성의 확실성은 가질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이라 하기 어렵다. 자기 선택적 신앙일 뿐이다. 이렇게 부족한 신앙은 유한한 자기 시야에 갇혀 자신의 개인적 편견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러한 신앙은 끝내 하느님의 자비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는 절망으로 기울 수도 있다.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덕은 우리가 자연적 이성의 한계를 넘어 자기 밖으로 나가 모험을 떠나게 하며, 사랑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되게 한다.

이러한 신앙의 움직임을 완성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의 신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다운 사랑의 관계에 근원적으로 들어가 그분을 닮은 모습을 회복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내어주심’은 자기 증여요 희생犧牲이다.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에 닿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이요 십자가 제물이 되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몸에 매일 그리며 살아가는 신앙인은 지상의 순례 동안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긴가민가한 모호함 속에서도 신앙의 신비를 “끝까지”(요한 13,1) 살아낸다. 이러한 신앙인은 때로 인생 중에 맞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하고, 구원의 신비와 결합하여 있음을 알고 믿는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한 그대로, 우리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비를 받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65) 한 그대로, 아버지의 허락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는 함께 있다가 떠난 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설령 누군가의 눈에는 무조건 믿고 보자는 식의 고백처럼 보일지라도 베드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의 신비요 부활의 신비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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