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5)

제15장

거룩한 망덕을 통하여 받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한 감정에 대하여

마치, 한낮의 태양 광신이 내리쪼일 때 우리는 그 광도(光度)를 거의 볼 수 없고 더위만을 느끼게 되듯이, 이처럼 신앙의 광채는 우리의 이성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지닌 그 찬연함을 펼치자마자 즉시 우리의 의지는 천상적 사랑의 거룩한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신앙은 속일 수 없는 확실성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무한히 착하시다는 것, 또 당신 자신을 우리를 통해 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통해 주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필설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자비의 감미로우심으로써 불멸하는 영광의 행복을 얻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다 마련하셨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최상 선으로 향하는 자연 본성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내밀한 초조와 열망과 불안에 잡혀 있게 되는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자체가 고요해지거나 또는 완전한 만족과 확고한 충족이 요구되면서도 그것이 결핍되어 있음을 그치지 않고 입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신앙이 우리 본성적 경향의 이 사랑함직한 대상을 우리 지성에게 제시하여 올 때 오, 테오티모여! 그 어떠한 즐거움이며 기쁨인고! 우리 영혼은 이처럼 뛰어난 아리따움에 얼마나 놀라며 전율케 되는지! 그래서 영혼은 사랑에 부딪혀 부르짖게 된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당신의 두 눈은 비둘기라오!”(아가 1,14)

엘리에제르Eliezer는 자기 주인인 아브라함의 아들 짝을 위해서 한 배필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열망대로, 아름답고 귀염성 있는 짝을 꼭 찾아야 했으나 어떻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물가에서 그러한 여인을 발견하였을 때, 즉, 미모와 우아함으로 갖추어진 뛰어난 그 여인을 보았을 때 특히 그 여인을 마침내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는 비할 데 없는 기쁨에 넘쳐 감사를 드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였다.(창세 24,48)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충분히 알지는 못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자연 본성의 경향상 하느님께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 신앙의 샘, 즉 신앙의 우물가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면, 더욱이 하느님께서 그처럼 착하시고 사랑스러우시고 감미로우시며 모든 이에게 그토록 고마우시며, 최상선이신 자로서 당신을 열망하는 모든 이에게 즐겨 자신을 주려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될 때, 오, 하느님! 그 어떠한 즐거움이오며, 더구나 더없이 사랑스러우신 이 선 자체에 자신을 온전히 영원히 결합시키려는 충동이 영혼 안에 얼마나 불이 일듯 일게 되는지!

이와 같은 영감을 받은 이는 말하리이다. “나는 찾아 얻었노라. 네 마음이 즐겨 찾아 열망하던 바를 드디어 나는 발견하였으며 이제는 평안히 쉬노라”라고. 또한 마치 야곱이 라헬을 보자 거룩히 입 맞추고 나서 그토록 고마운 상봉에서 체험한 행복에 젖어 눈물을 흘렸듯이(참조. 창세 29,11), 우리의 가련한 마음도 하느님을 발견한 후에는, 즉, 하느님께 첫 입맞춤, 곧 거룩한 신앙의 입맞춤을 받고 난 후에는 그 최상의 아름다움 안에서 발견해 가는 무한한 선에 대한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용해되어 가게 마련이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뚜렷한 이유가 없이도 의외로 생기는 기쁨을 우리 안에서 느끼게 될 때가 있는데 이것은 흔히 보다 더 위대한 즐거움의 예감 또는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우리의 착한 수호천사가 우리에게 주어질 선을 예견하여 그러한 수단으로 그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수호천사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기쁨을 미리 조금 맛보게 하는 반면에 미지의 위험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어 하느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으면서 우리의 수호천사에게 굳건히 의지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징조를 보인 어떤 선이 이미 현실적으로 도달되었을 때, 우리는 팔을 벌리고 이를 받아들이게 되며, 원인을 모르고 먼저 느꼈던 기쁨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앞서 느꼈던 것이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의 선구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우리의 마음은 그 최상선으로 가려는 경향을 오랫동안 지녀 왔었으므로 이 충동이 지향하였던 바가 무슨 목표였는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이를 입증해 주게 되면 이때 사람은 이것이 곧 자기 지성이 찾아 구하던 바이고, 또 자기의 경향성이 향해 있던 것임을 식별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영혼이 저 최상선으로 향하여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최상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저 착한 아테네인들과도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되신 하느님께 희생을 바치고 있었으며, 위대하신 성 바오로 사도께서 비로소 그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사도 17,22-31)

이렇게도 우리의 마음은 깊숙하고 은밀한 본능으로써 모든 작용에 있어서 행복이란 것으로 향하고 그것을 목표 삼으며,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찾고 있고, 그 행복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더듬어 헤매며, 무엇에 있는지도 모르고 신앙이 그것에 대하여 무한히 기묘한 바를 입증하고 서술해 주기까지는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이 마음이 찾아 구하던 그 보배를 발견하게 될 때, 오! 이 가련한 인간의 마음에는 그 어떠한 만족과 사랑과 기쁨이 넘치겠는가? 오, 나는 내 마음이 알지도 못하면서 찾고 있던 이를 만났노라 나는 내가 찾고 있던 바를 모르고 있었으며 또 그때에는 아무것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었으니, 내가 찾고 있던 그 모든 것은 실제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아니었었기 때문이로다!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해 보려고 찾아 헤맸으나, 사랑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고, 또 그래서 나의 지향은 제 참된 사랑을 발견치 못한 채, 나의 사랑은 항상 참되긴 하였으나 자신도 모르는 지향 속에 머물고 있 다. 참으로 나는 나로 하여금 사랑할 이를 찾게끔 만드는 사랑에 대한 넉넉한 맛을 미리 맛보긴 하였으나, 내가 사랑하였어야만 했고 또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행해야 하는 저 선에 대한 충분한 지식은 없었도다. 즉 나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했어야 할 선의 감정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였다.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
*

이 사이트는 Akismet을 사용하여 스팸을 줄입니다. 댓글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