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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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친화력親和力에 대하여

사람이, 조금이나마 주의를 기울여서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생각해 보면, 자기의 마음에 어떤 달콤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감정은 하느님께서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의 신성에 대해 미치는 그만큼, 우리의 지성이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성에 대해서 생각함은 아주 사소한 인식에 불과한 것인데, 이것은 철학자들의 으뜸(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특히 그의 다음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De Part. Animal. 1권 5)이 말하듯이, 그래도 그것은 다른 사물에 관한 가장 위대한 지식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겠으니, 흡사 태양의 가장 미소한 광선이라도 달이나 별들의 가장 큰 빛보다 훨씬 더 밝은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달과 모든 별의 빛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밝다고 하겠다. 또 만일 어떤 급작스러운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경악하게 하는 경우, 이러한 사건은 즉시 우리가 하느님의 신성에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 가게 하는데, 만사가 다 잘 안 될 때는, 하느님의 신성만이 좋으시고, 어떠한 위험에서도 그분만이 홀로 최상의 선으로서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이러한 즐거움, 이러한 신뢰심은 인간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갖게 되는 것이며, 친화력 이외에 다른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착하심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는 크고 은밀한 친화력, 또는 적성適性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각자 누구나가 알기는 하되, 깨닫고 이해하는 자는 매우 작으며, 도저히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나 또 쉽게 파악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비슷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하느님의 그 위엄과 우리와의 사이에 있는 극단적인 최대의 친화력이 아니고 무엇을 뜻하는 것이랴?

우리의 영혼은 영신적이고 불가분적이면서 또한 불사불멸적이므로 아주 자유로이 이해하고 뜻을 가지며, 판단하고 추리하고 깨닫는 능력이 있고 또 하느님을 닮게 되는 덕이란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영혼이란 온전한 전체가 온전한 육신 전체에 자리 잡고 머물러 있는 것이며, 육신의 전 분야에 걸쳐 온전히 들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느님의 신성이 온 세상에 충만히 세상 어디에나 다 계심과 비슷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지성과 의지에 의해서, 그 행동에 의해서 발산되고 표현된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의지라는 것은 지성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서로 구별이 되는 것이며 더구나 영혼 내에 일치되어 있어서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일치되어 머물며 또 여러 기능 속에 있음으로써 이 기능들에서부터 발하여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곧 성자가 성부께 대한 지식, 혹은 인식으로 착출搾出되어 성부께로부터 나오듯이 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내뿜어지는 상호 간의 사랑으로써 두 분에게서 발하심과 같으니, 이 세 위는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으시며, 하나로, 아주 동일하신 한 분으로 일치되어 계시며 단순하시고 온전하시며, 나누일 수 없는 신성이 되심과 같다.

그러나 이 닮음에서 오는 친화력 외에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비할 데 없는 대응성이 있으니, 그것은 곧 상호교차되는 완전성인데, 하느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무슨 완전성을 받을 수 있음이 아니라, 그 이유는 인간이란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 오히려 하느님의 착하심에 의해서이니, 하느님의 착하심만이 자기의 완전성을 자기 밖으로, 즉 인간들 위로 내뿜어 작용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인간)는 선을 받으려는 위대한 요구와 수용 능력을 지니고 있고, 후자(하느님)는 그러한 선의 완전성을 태워 주시려는 큰 경향성과 동시에 풍성한 선을 가지고 계신다. 자유로운 풍성함만큼 궁핍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떤 궁핍한 필요만큼 자유스러운 풍성함에 알맞은 것도 없다. 또 선이란 것이 차고 넘치도록 많으면 많을수록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경향성이란 밖으로 번지고 남에게로 상통相通하려는 힘이 그만큼 강하게 되는 것이다. 곤궁한 궁핍의 강도强度가 심하면 심할수록 받으려는 수용성受容性도 심각해진다.

즉, 자아충족을 시키려는 탐욕적인 열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궁핍성과 중요성이 서로 만나는 것은 얼마나 서로 달갑고 열망함직한 것이랴! 그러므로 타에게 부어주려 하고 통해 주려 하는 풍성함을 지닌 선과, 타에게서 부어줌을 받으려 하고 보탬을 얻으려 하는 선과의 사이에 있는 그 큰 만족감과 기쁨을 우리 주님 이외에 그 누가 제대로 말할 줄 알았으랴? 주께서는 말씀할 줄 아셨고 또 할 수 있으셨던 분이니,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사도 20,35) 하셨다. 만일 그것이 그처럼 복되고 큰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착하심은 당신의 풍성한 은총이 없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심으로써 아주 큰 기쁨을 누리실 것이다. 때때로 어머니들은 가슴에 젖이 많이 불어 오르게 되면 아기에게 그 젖을 빨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마련이고, 또 아기가 아주 정신없이 빨아 먹을지라도 어머니는 아기에게 더욱 극진히 젖을 빨도록 대어 주며, 아기가 얼마 동안 굶었거나 또 어머니도 얼마간 빨리지 않았을 경우, 아기는 매우 자극되어 있고 엄마도 자동적으로 젖이 충일되어 있다.

거룩한 정배는 일치의 입맞춤을 몹시 열망하였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주었으면!”(아가 1,2ㄱ) 그러나 지극한 애인에게서 친애를 받은 애인이여, 너와 너의 정배 사이에는 네가 열망하는 저 일치에 도달키 위하여 충분하다고 할 만한 친화력이 있는가? 네, 내 영혼이 극진히 사모하는 나의 벗이여, 내게 입 맞춰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답니다. 정녕 당신의 향유 내음은 싱그럽고 당신의 이름은 부어놓은 향유랍니다.”(아가 1,2ㄴ-3ㄱ) 그의 착하심의 덕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포도주는 그 자체 내에서 그 선성善性의 힘으로 말미암아 작용되어 충일되며, 결코 보통 쓰는 통 속에 담아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의 젖가슴은 훨씬 좋으며 계속적인 충일로 그대의 앞가슴을 더욱 부풀게 하며 젖이 넘쳐흐르게 되고, 가득히 붇고 충일되기를 원하였듯이, 그대의 마음이 열애하는 자녀들을 이끌어 빨게 하니, 그 젖의 향기는 모든 향액보다 훨씬 매력적인 향기를 내뿜는다.

테오티모여, 이처럼 우리의 공허空虛함은 그 자체의 필요성으로 봐도 하느님의 풍성함을 몹시 요청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지니신 그 풍성하심은 우리의 곤궁을 반드시 필요로 하시지는 않으시고, 오로지 당신의 완전성과 탁월성의 면에서만, 즉 그 착하심의 성질상으로만 우리를 원하실 따름이다. 그리고 교통해 줌으로써 그 선의 풍요함이 더 나아지지 아니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자신에게서부터 밖으로 쏟아부어 줌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에게 무엇인가 자기 것을 주게 되기 때문이므로, 우리의 가난함과 궁핍함은 하느님의 중요함에 의해서 부하게 채워지지 아니하는 한, 늘 곤궁하고 비참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아무것도 자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고 세상의 어떠한 것도 우리 영혼의 수용성을 채울 수 없음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있는 이성, 또는 지성이란 것이 무한히 알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음과, 우리의 의지는 선을 발견하고 사랑함에 있어 늘 불만족한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영혼은 이에 반항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즉 불만을 터뜨릴 권리가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너머에는 반드시 내가 의존해야 할 선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무한한 작품자가 내 안에 이 만족할 줄 모르는, 늘 안식을 모르는 욕구와 지식에 대한 끝없는 열망을 넣어 준 것이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로 향하고 지향하여 내 자신을 그의 착하신 선성에 일치시키고 결합시켜야 하리니, 나는 그이께 예속된 존재이며, 나는 바로 그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람의 영혼 사이에는 이러한 친화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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