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다’해(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Basilica del Sacro Cuore, Roma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주일인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모든 시대 목자들의 모범인 사도 바오로에 관해 듣고, 제2독서인 묵시록에서는 “어린 양”이라 불리는 목자(예수님)의 보살핌을 들으면서 복음을 준비한다. 교회는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이요 ‘착한 목자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교회에서 착한 목자요 일꾼으로서 봉사할 분들을 청하면서(마태 9,37 루카 10,2) 그분들을 위한 기도와 정성을 모은다. 부활 제4주일에 착한 목자 주일을 지냄은 특별히 예수님의 수고 수난 때에 흩어지고 잃어버렸던 양 떼를 다시 모아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나아간다는 전례적 의미가 있다.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의 복음은 대목이 서로 다를지라도 항상 요한복음 10장에서 취한다. 요한복음 10장은 “겨울, 성전 봉헌 축제”(요한 10,22) 동안에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상황에 있다고 말씀하신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의 지도층과 벌인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마지막 논쟁이 벌어지는 내용을 담는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죄 중에 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신원과 행적을 보면서도 올바로 식별하지 못하고, 그들이 스스로 보고 있으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참조. 요한 9,40-41) *성전 봉헌 축제는 12월 중순 무렵에 지내는 축제로서 BC 164년 마카베오 형제가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 정화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은 양들이 있는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이며 도둑처럼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지 않고, 돌보는 양들을 하나하나 알뿐만 아니라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안다고 설파하신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도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였다.(참조. 요한 10,1-6)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 사명에 관하여 당신은 “양들의 문”이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 “착한 목자”이고, 이처럼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목숨을 다시 얻는다는 사실(참조. 요한 10,7-17)을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선언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 사이에 다시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10,19)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두고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마귀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며 예수님께서 구원의 행위를 하시는 것을 인정한다.(참조. 요한 10,19-21)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메시아라면” 분명하게 이를 밝히라고 요구한다.(참조. 요한 10,22-24) 유다인들의 압박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하고 대답하시면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 10,25-26) 하신다.

이쯤 해서 우리는 중요한 내용 하나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성경에서 양과 목자라는 주제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사회가 목축 농업과 유목 사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목자가 된다는 것은 당연히 주류를 이루는 직업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유목 목축 농업의 사회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회를 살아간다.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을 맞닥트릴 일도 드물고 양 떼나 목자를 보는 일조차 희귀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양 떼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팔레스티나를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쉽게 피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목자와 양 떼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대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사용되는 동사動詞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시도해보려 한다. 예수님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고 ‘당신과 함께 울타리 안을 드나들었던 이들’의 마음 안에 당신 행적으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신 분이다.

1. “내 양들알아듣는다따른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하신다. 한 문장 안에 ‘알아듣다’, ‘알다’, ‘따르다’라는 동사 셋이 연이어 등장한다. ‘들음앎’이 되고, ‘’은 ‘따름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태도는 우선 믿음이 가는 말씀을 들어 그분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 내딛는 첫 번째 걸음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닌 진정 마음으로 듣는 ‘들음’이다. 우선 들음은 말하는 이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담긴 음색을 식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잘 들어야 하고, 잘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 들어야만 말에 담긴 사랑과 진심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유다인들로부터 전해져 그리스도교가 된 믿음은 한 마디로 이 ‘들음’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Shema‘ Jisra’el)!”(신명 6,5 마르 12,29와 병행구) 하고 신약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fides ex auditu)”(로마 10,17)라 한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들어야만 한다.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을 ‘듣는 예술’을 통하여 그분과 나날이 깊어가는 깊은 통교를 이룬다.

“듣는다” 하신 예수님께서 다음으로 “따른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묵시 14,4)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1요한 2,6) 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삶을 일치시키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걷도록 요구하시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목자는 거의 양 떼에 앞서가며 그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지만, 양 떼들이 쉬고자 할 때는 양 떼가 흩어지거나 길을 잃을지도 몰라 노심초사하며 양 떼의 뒤에 있을 줄도 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와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시면서 앞서지도 말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며 길을 잃거나 공동체를 떠날 위험에 대비하여 그렇게 당신을 ‘듣고 따르라’ 하신다.

이처럼 ‘듣고 따르면서’ 목자와 양들처럼 생명을 나누는 관계 안에는, 곧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이 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기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우리를 아신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성실히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곰곰이 새겨, 듣다 보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은 더욱 깊어가고 서로를 꿰뚫어 보게 되면서사랑이 터져 나오는 역동적인 앎이 된다. 이러한 ‘앎’ 안에서 우리는 감히 예수님 곁에 내가 있고, 예수님께서 내 곁에 계셔 예수님과 내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착한 목자”(요한 10,11.14)이시면서 또한 친구이시고 성실한 연인이시기도 하다.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사랑을 알며, 그분의 사랑스러운 시선에 꽂힌 느낌 속에서 마침내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들어서 따르게 되고, 따라서 알게 되면, 거기에 ‘사랑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한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알아서 모시게 되는 우리의 목자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15) 하신다.

오늘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들이 참 많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들려온다. 사실 인생은 그 인생살이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영원을 향하여 방향 지워져 있다는 영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만 비로소 공허하지 않고 의미가 있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소리와 소음 중에 살아간다. 진정으로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한다. 또 우리가 듣고 싶은 소리와 목소리가 과연 어느 목소리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아니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의 영적인 주파수를 그분의 주파수에 맞추려고 노력하는가? 그분은 우리를 아시는데, 우리는 그분을 아는가?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가? 사랑은 들음에서 시작된다.

2. “내 손에서내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요 우리가 그분의 손안에 있어 그 누구도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깊은 확신을 기대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요한 10,28-29) 하신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를 만져 낫게 하시고, 엎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손이며, 베드로처럼 우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참조. 마태 14,31) 우리를 잡아당겨 당신께로 이끄시는 손이고,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건네주시는 손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신 표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손(참조. 루카 24,39 요한 20,20.27)이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손이며(참조. 루카 24,50),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느라 우리에게로 뻗어있는 손이다.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은 그분의 손안에 우리의 손을 넣고, 그래서 그분께서 꼭 붙잡고 함께 걸어주셔야만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며, 가끔 넘어지는 불행이 찾아오더라도 항상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힘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손은 과연 힘이 있는 손이다. 예수님의 손은 살리는 손, 용서하시는 손, 무엇이든 받아주시는 손, 보호하시는 손, 지지하시는 손, 낫게 하시는 손, 구원하시는 손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러하리니 내 손에 든 것을 빼내 갈 자 없으리라. 내가 하는 일을 누가 돌이킬 수 있겠느냐?”(이사 43,13) 하시는 손을 가지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의 손이 되겠다고 약속한 우리의 손은 과연 어떤 손인지를 돌아볼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영원한 생명이자 그 누구도 그분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밤길에서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매는 밤길에서도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그렇다고 또 누군가가 우리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해도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이고 주님과 우리가 맞잡은 손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 “환난…역경…박해…굶주림…헐벗음…위험…칼…”(로마 8,35),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곧 아버지의 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염없이 흔들리고 가난한 인간이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강한 손을 잡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폭력도 불사하며 우리를 훼방하려 들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도 바리사이인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요한 10,31) 예수님의 행적과 사랑의 말 앞에 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하느님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한다, 그들은 인간이 필요 없는 하느님, 인간을 거스르는 하느님, 그들만의 하느님을 만들어 섬기고자 참 하느님께 서슴없이 돌을 던지는 패악을 벌인다. 그들은 인간보다 종교를 더 사랑하고, 사상이나 교리를 더 사랑하려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 곁에 있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연약하며 죄에 빠진 우리의 형제이며 자매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손을 뻗쳐 그들을 잡으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구해주시리라.

3. “아버지와 나는 하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신다. 이러한 말씀의 패턴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에 비추어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보면 ‘나는 인간이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나는 인간과 하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계시의 정점이다. 451년 10월 8일 개막된 칼체돈Chalcedon 공의회가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을 선언하고 『한 위격 안의 두 본성이신 하느님』이라는 신앙 명제를 올바로 밝혔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 짓는 근거가 바로 이 말씀이다. 유다인들에게는 돌을 던지려 들 만큼 물의를 일으킨 말씀이지만, 우리의 목자이시며 사람이 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아멘!

***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당신께서 아신다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신다는 것은 그분과의 소통이요 우리의 행복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들, 당신께 속한 이들, 그리고 “당신의 사람들만”(2티모 2,19) 아신다. 그분께서는 잃어버린 이들, 죄인들, 그분의 은총을 필요로 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와 같은 이면 그 누구라도 당신의 양으로 알아주신다.…성부께서 성자를 아드님으로서 아신다는 것이 성부의 행복이었으며, 성자께서 성부를 아버지로서 아신다는 것이 성자의 행복이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아시는 것이 사랑이요 통교이며 일치이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당신의 소유요 당신께 속한 이들로 아신다는 것이 구세주의 행복이라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 모시는 것이 죄인들의 행복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상호 사랑의 일치로 연결되어 계시듯이 그렇게 당신께 속한 이들과 연결되어 계심으로써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속한 이들과 당신의 양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넘겨주셨고, 이로써 그분의 양 떼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

One thought on “부활 제4주일 ‘다’해(요한 10,27-30)

  1. 손을 놓치지 않을
    나의 든든한 빽을
    자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주파수 맞추기.
    걱정할게 없는 것을.
    사랑으로 꽉 채웁니다.
    지금
    이 공간과 마음이라는 곳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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