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사도

마르코 루프닉(Marko Rupnik) 신부가 제작한 현대적 양식의 모자이크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사도 토마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 토리노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는 똑같은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요한 11,16;20,24;21,2) 우리는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어쩌면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였을지도 모른다.(요한 21,2참조)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주로 요한 복음서에서 온 것이다. 공관 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카)에서 그는 그저 열두 사도의 명단에만 등장할 뿐이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그의 이름인 토마스(Thomas)는 ‘두 배(더블)’ 또는 ‘쌍둥이’를 의미한다.(히브리어 토암, תְּאוֹם이나 아람어 타우마. תָּאוֹמָא, 그리스어로는 디디모스, Δίδυμος, Didymos) 토마스는 사도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4세기의 위경(외경)인 《토마스 행전》과 《토마스 복음서》가 그의 이름으로 저술되었을 것이다. 이 문헌들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다.”(베네딕토 16세, 2006년 9월 27일)

토마스는 새로운 요나?

교회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는 인도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인도 남부 말라바르 해안의 케랄라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그의 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이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사도 토마스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위경 《토마스 행전》(1-2장)은 그가 선교사로 파견되는 과정을 독특하게 묘사한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세계의 지역들을 나누었을 때, 인도가 토마스의 몫으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꿈에 나타나 그를 격려하셨다. “토마스야, 두려워하지 마라! 내 은총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너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수님조차도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주님,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인도만큼은 정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음 날 예수님은 … 해변에 나타나, 건축가를 찾고 있던 한 인도인 상인이자 항해사에게 토마스를 노예로 팔아넘기셨다.(이 때문에 성 토마스는 건축가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도행 배에 올라타야만 했다! …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토마스

토마스는 요한 복음서에 네 번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사도들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다.

첫 번째(요한 11,16):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라자로의 죽음 이후 다시 유다 지방으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다. 토마스는 스승을 죽음까지 따르겠다는 각오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단호함 앞에서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동참을 촉구한다. “우리도 함께 가서 죽읍시다.” 여기에서 스승의 운명을 기꺼이 나누려는 호기 있고 결단력 있는 토마스의 모습이 나타난다.

두 번째(요한 14,5): 최후의 만찬 자리다.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며 사도들도 이미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실용주의적이었던 토마스는 언제나처럼 주님을 따를 준비를 한 채 외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의 이 반응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그 유명한 요약,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는 선언을 이끌어낸다.

세 번째(요한 20,24-29): 토마스에게 ‘의심 많고’ ‘고집 센’ 자라는 낙인을 찍은 사건이다. 그는 간접적인 소식에 만족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보겠다’고 요구한다. 예수님은 오직 토마스만을 위해 제자 공동체를 두 번째로 방문하신다. 첫 번째 발현 때 이미 선교 파견과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20,19-23) 스승 앞에 선 토마스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신앙 고백”(베네딕토 16세)을 터뜨린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행복 선언을 하신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

네 번째(요한 21,2):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단순하게 언급된다. 베드로의 곁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토마스에게 부여된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다.

토마스, 예수의 쌍둥이?

토마스라는 이름이 지닌 ‘두 배’ 혹은 ‘쌍둥이’라는 의미는 매우 시사적이다. 요한복음서는 이 점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11,16;20,24;21,2) 쌍둥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이름’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삶에도 낙인을 찍는다.

토마스의 선교 활동을 다소 이색적으로 전하는 위경 《토마스 행전》(여기서는 ‘유다 토마스’라 불림)에 의하면, 한 번은 예수께서 그의 “형제”로 나타나기도 하고(11장), 더 나아가 어떤 암나귀의 입을 통해(발라암의 나귀와 유사하게!(민수 22,28 참조)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쌍둥이 형제라고 불리기도 한다.(39장)

이것은 예수와 이 사도 사이의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에서 ‘친구’(요한 15,15)로 부르셨고, 부활 후에는 ‘형제들’(20,17)이라고 부르셨다. 영적인 의미에서 ‘쌍둥이’라는 범주는 제자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친교의 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토마스, 우리의 쌍둥이

쌍둥이는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집단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간적 현상이다. 우리 역시 토마스가 도대체 누구의 쌍둥이인지 알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는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의 쌍둥이일지 모른다. 실제로 토마스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복음서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나엘이 한 첫 번째 신앙 고백(요한 1,45-51)에 해당한다. 또한 그들의 성격과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마지막으로 두 이름은 열두 사도 명단에서 비교적 가까이 붙어 있다.(마태 10,3 및 사도 1,13)

이러한 미지의 영역은 “토마스는 우리 각자의 쌍둥이”(돈 토니노 벨로 주교)라고 단언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토마스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겪는 의심 속에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거울 보듯 비추어 보며, 그의 눈과 그의 손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하신 분의 몸을 ‘보고’ ‘만진다’. 참으로 매력적인 해석이다!

토마스는 내면이 분열된 이중적 존재’?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쌍둥이는 에사우와 야곱이다.(창세 25,24-28) 그들은 영원한 적대자였으며 인간 조건이 가진 이분법과 극단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혹시 ‘이중성’을 뜻하는 토마스 역시 자기 내면에 그러한 두 가지 성향의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때로 엄청난 관대함과 대담한 용기의 몸짓을 보여주다가도, 어떨 때는 의심 많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스승과 마주했을 때, 신속하고 확신에 차서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인으로서의 깊은 정체성이 다시 솟구쳐 오른다.

토마스는 자기 안에 자기 ‘쌍둥이’를 품고 있다. 위경 《토마스 복음서》는 그의 이러한 이중성을 강조한다. “전에는 하나였으나 이제 둘이 되었다.”(1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아담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105절)

토마스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우리 역시 내면에 자신의 생각을 끈덕지고 완강하게 방어하며, 태도에 있어서는 고집스럽고 변덕스러운 ‘쌍둥이’를 품고 산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 또한 인간이 가진 이 ‘이중성’의 현실을 성찰했다. 겉보기에 한결같아 보였던 그조차도 이를 경험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바오로는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쌍둥이의 정체성을 정의했다. 하나는 ‘옛 아담’의 유산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새로운 피조물, 곧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이다.

이 두 실재, 혹은 두 ‘피조물’은 우리 마음속에서 제대로 공존하지 못하고 갈등하며, 때로는 공공연한 전쟁을 벌여 개인의 정체성과 내면의 평화를 해친다. 이 내적인 분열의 고통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토마스는 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둡고, 뒤틀리고, ‘의심하는’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어 예수님과 마주하게 했다. 보고 만지기를 요구하는 제 ‘반항적인’ 내면이 던진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 … 그것을 예수님께 가져갔다. 그리고 명백한 증거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두 명의 토마스가 마침내 하나가 되어 동일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순종적이지만 … 동시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착한 쌍둥이’들만 가득하다! 그 몸들에는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복음화되어야 할 에너지가 넘치고 본능적인 부분은 그 ‘만남의 자리(미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으나, 우리 교회는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의인들’로 붐빈다! 정작 회개해야 할 다른 쪽 쌍둥이인 ‘죄인인 나’는 집안에 편안히 남겨둔다. 일요일이니 좀 ‘쉬라’고 배려하면서, 하루를 ‘착한 쌍둥이’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월요일이 되면, 본능과 열정에 충실한 그 쌍둥이가 다시 완벽한 컨디션으로 주도권을 잡는다.

토마스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토마스 같은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주일 전례에서 주님이 찾아 나서시는 이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다 …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진짜 ‘쌍둥이’가 될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실재적인’ 남녀를 찾으신다. 본능의 압제 속에서 살을 깎는 ‘고통을 겪는’ 죄인들 말이다. 은총에 저항하고 의심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 앞에 드러내는 신앙인들, ‘신자들의 모임’에서 그저 보기 좋은 모습을 연출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신적 의사이신 분을 만나 치유받고자 오는 이들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이들의 형제가 되어 주신다!

세상은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식 존경심 뒤로 자신의 ‘이중성’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오류와 의심과 어려움을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한 신앙인들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선교에는 목을 꺾고 거룩한 척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진정성 있는 제자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상처를 제 손으로 만지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선교사들 말이다!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신앙의 빛 안에서 악에 맞설 줄 아는 이들, 그러나 머리와 가슴, 영혼과 ‘본능’으로 동시에 반응하는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의 힘과 결단력을 지닌 그런 이들이 필요하다.

토마스는 우리에게 우리의 이중성을 화해시키고, 다시 태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초대한다!

위경 《토마스 복음서》(22절, 2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기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젖을 먹고 있는 이 아기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과 같다’ 하셨다.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었다. ‘그러면 저희가 아기들처럼 작아져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내부를 외부처럼 만들고 외부를 내부처럼 만들며, 위를 아래처럼 만들 때, 또한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만들어 남성은 더 이상 남성이 아니고 여성은 더 이상 여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게 될 때, 너희가 눈이 있던 자리에 눈을 두고, 손이 있던 자리에 손을 두며, 발이 있던 자리에 발을 두고, 거짓 이미지 자리에 참 이미지를 놓을 때, 그때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번역 글: 글쓴이는 마누엘 주앙 페레이라 코레이아 신부(P. Manuel João Pereira Correia mccj)이며, 이탈리아 말 원문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https://comboni2000.org/2025/07/02/3-luglio-san-tommaso-un-apostolo-e-il-suo-misterioso-gemello/

*함께 읽기: 성 토마스 사도(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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